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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모순을 읽고"

이태원프리덤@ 2023. 8. 9. 15:07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 p15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 p64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27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지닌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 p142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 p268


그냥 살아가는 혹은 살아지는 일상을 찬찬히 뜯어보면 말도 안 되는 모순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가 있다. 행복하려고 돈을 버는 건데 돈을 버는 시간들이 불행하게 느껴질 때가 있고 여유 있는 삶을 원해서 여유를 만들어내면 막상 그 여유가 불편해지면서 차라리 바쁘게 지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 p303(작가의 말 중)

처음 '모순'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롤러코스트처럼 역동적이고 급격한 사건이 발생한 이야기인가보다 했다. '모순'이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인상이 좀 강한 탓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안진진이란 20대 여자의 이야기로 채워진 '모순'은 어찌 보면 무지 평범하고 보통날인 이야기인데 느릿느릿, 천천히 읽혀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작가도 작가의 말에 천천히 읽혀지는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천히 읽어나가면 '모순'이 어제의 뒷면에, 오늘의 뒷면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안진진이란 이름도 진진을 부정하는 '안'씨가 떡하니 있어 진진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는, 모순적인 이름 아닌가 싶다. 하하

진진은 문득 인생에 온 생애를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갑자기 빈약한 인생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진진의 이야기 '모순'이 시작된다.

진진의 엄마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래서 엄마와 이모는 외향적으로 똑같다. 4월 1일 만우절에 태어나서 동시에 4월 1일, 같은 날 결혼식을 올렸다. 진진의 엄마는 집을 나가기 일쑤인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억세고 억센 사람이 되어갔고 이모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 정해진 계획대로 삶을 살아가는 남편과 결혼해 삶의 풍요를 여유 있게 누리는 사람이 되어갔다. 쌍둥이의 앞면은 똑같은데 뒤집어보니 한 명은 빈곤, 한 명은 풍요 속에 삶을 안착했다.

진진은 김장우와 나영규라는 두 남자와 만남을 이어간다. 결혼은 사랑이 가미된 현실이냐, 그저 사랑이냐로 갈리는 두 남자와의 만남. 미지근한 듯한 온도의 만남 속에서 결혼이라는 팻말을 누구와 함께 뽑을 것인지, 진진의 고민이 깊어진다. 난 진진이 현실보다는 사랑을 택할 줄 알았는데, 진진은 현실을 택했다. 현실을 택하게 된 이유 가운데에는 이모의 죽음이 있었다. 엄마가 이모만 만나면 톡 쏘면서 불 붙는 화살마냥 이야기할 정도로 부러운 삶을 살고 있었던 이모는 유학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한 자녀들을 뒤로 한 채 생을 마감했다. 이모는 진진에게 편지를 썼다. 뒤치다꺼리하면서 속 시끄럽게 사는 진진의 엄마가 부러울 정도로,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이모가 그런 결정을 했더라도 진진은 자기가 겪어보지 못했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집을 주기적으로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던 진진의 아버지는 불편한 몸이 되어 돌아왔다. 진진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집에 있으라는 말을 모독이라 여겼던 아버지는, 결국 모독 가운데에 누워지내게 됐다. 진진의 동생 진모마저 감옥에 있게 된 이 상황에서 진진의 엄마는 이상하리만치 활력 있게 가족 모두의 뒷바라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삶이 푸석해지고 답답해질 수록 강해져만 가는 엄마의 기운. 세상 모든 엄마의 에너지는 모순 자체란 생각이 든다. 고요한 집 안에 있을 때보다 시끌벅적, 와장창 정신 없이 돌아가는 시간 속에 있을 때 에너지가 하늘 위로 치솟는다.

진진은 이렇게 말한다. '모순'의 시간을 겪어보니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고. 실수가 되풀이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렇다. 인생은 모순인데, 이 모순을 피한다고 해서 모순이 영엉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선택과 결정이 모순이 되어 실수가 되더라도 그것이 인생이고 탐구의 결과물이라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