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Nomadland)>(2020)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파산의 나락으로 빠진 미국인의 피폐한 삶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노매드랜드>는 인간 본연의 고독과 상실감, 그리고 '정처 없음'의 아득한 본질을 파고든다.
안정된 사회 체계와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자연과 길을 벗 삼아 부유하는 유랑의 삶, 동시에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하는 개인의 마음 풍경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노매드랜드>의 원작과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가 쓴 원작 논픽션은 사회비평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그런데 클로이 자오(Chlo? Zhao) 감독은 <노매드랜드>를 개인 심리에 훨씬 큰 무게를 둔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프란시스 맥도맨드(Frances McDomand)가 연기하는 펀의 사연과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펀은 어쩔 수 없이 '길바닥 생활'을 시작하지만 곧 정착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진다.
원작 르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 상당수가 영화 <노매드랜드>에도 실명(實名)으로 출연한다. 굉장히 독특한 요소다. 그들은 '논픽션(원작)'과 '픽션(영화)'에 동시에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그들 하나하나가 엄연히 주인공이지만, 영화화(허구화)가 되면서 조연(주변 인물)으로 축소됐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므로 이러한 위치 변화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린다 메이(Linda May)라는 인물이 영화화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그녀는 원작에서는 실질적인 주인공 격인데, 영화에서는 꾸준히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이 그리 높지는 않다.
물론 영화 <노매드랜드>는 논픽션이라는 모태(母胎)를 충분히 의식하고는 있다. 일례로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이 영화를 위해 실제로 유랑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작의 세계관에서 보면,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연기하는 펀은 가장 이질적인 요소다. 무엇보다 그녀는 원작 논픽션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완벽한 가공인물이기 때문이다.
펀이 유랑민이 되는 계기로 작용하는 네바다 주 엠파이어 마을의 몰락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남편을 잃었다든지 언니가 캘리포니아에 산다든지 다른 유랑민인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David Strathairn))와의 로맨스 등, 펀을 둘러싼 이야기는 모조리 허구다. 펀이 유랑 생활을 하며 직면하는 상황의 대부분은, 사실 린다 메이가 겪은 체험이다.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가장 논란으로 떠오른 것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샬린 스왱키(Charlene Swankie)다. 그녀는 영화에서 암에 걸렸는데도 치료를 거부하다가 결국 죽는데, 이 또한 허구다. 스왱키가 실제로 암에 걸린 것은 맞지만, 여전히 생존해 있다.
샬린 스왱키의 '연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린다 메이나 밥 웰스(Bob Wells)는 비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 성격은 원작이나 영화나 다르지 않다. 반면 샬린 스왱키의 경우는 다르다. 원작에서 (실존 인물인) 스왱키는 원기 왕성하고 자상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재연(再演)'된 인물인) 스왱키는 다소 성깔 있으면서 은둔을 지향하는 노인으로 묘사된다.
이는 논픽션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 흐릿하지만 눈에 띄는 실금을 남긴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진짜 노마드들이 대거 출연해 자신의 실제 사연을 토로한다. 이는 <노매드랜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며, 기성 극영화와 차별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허구 캐릭터인 펀 또한 <노매드랜드>가 기본 전제로 깐 리얼리티의 세계에 편입하려고 발버둥 친다. 이를 위해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전라로 등장하는가 하면 진짜로 대변을 보는 등, 할리우드 메이저 배우가 꺼리는 연기도 감행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영화가 '실화'라는 착각에 잠시 빠진다. 이러한 혼동은 <노매드랜드> 제작진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다. 하지만 원작을 읽는다든지 다른 경로를 통해 허구가 상당수 섞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샬린 스왱키가 대표적인 예다. 진짜가 대거 유입됐다고 해서, 가짜라는 본질이 바뀔 수는 없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스토리와 크게 다른 창작물은 많다. 하지만 <노매드랜드> 내부에 '실재하는 세계'는 다른 곳(현실)에서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 문제로 부각된다. 영화가 묘사한 세계와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금융 위기와 대침체라는 직격탄으로 집도 직장도 잃고 유랑민이 되어 임시 노동직을 전전하는 처지로 몰렸지만 '노마드랜드(원작 표기에 따름)'라는 대안 공동체를 모색하는 미국인들의 거시 담론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충격과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해 전국을 떠돌다가 결국 체념과 치유의 길을 꿈꾸는 개인의 미시 담론으로 탈바꿈했다.
21세기 미국의 병폐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해결책을 섬세하게 모색하던 르포르타주는, 영상화를 통해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노래가 잘 어울리는, 장대하기는 하지만 내밀하기 짝이 없는 풍경화로 바뀌었다.
미국 중서부의 대자연은 인간의 아픔까지 치유할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이는 픽션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는 하다. <노매드랜드>는 본질적으로 극영화다. 원작에 100% 가까이 충실했다면, 현재 나온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들던 감동은 느끼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종의 '왜곡'을 통해 작품성과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고난도 작업을 감행한 것이다.
원작의 세계관과는 별개로, <노매드랜드>는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다. 클로이 자오는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나 지아장커(賈樟柯)에 견줄만한 연출력을 통해 영화만의 독자적인 설득력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혹자는 테렌스 맬릭(Terrence Malick)과 비견하지만, 맬릭처럼 추상적·현학적이지는 않다. 훨씬 직관적이다.
아울러 클로이 자오의 원래 국적이 중국이라는 점이 '픽션' 측면에서 <노매드랜드>의 결정적 장점으로 작용했다. '이방인'의 시각으로 인해, 영화는 자국민·내부자가 쓴 원작과 구분되는 고유의 아우라를 지닌 '2차 창작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러한 연출력 덕분에, <노매드랜드>를 보는 관객은 영화를 단순히 미국만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기와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초월한, 언제 어디서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작품으로 여긴다. <파리, 텍사스(Paris, Texas)>(1984) 이후 사그라든 줄 알았던 '마음을 떠도는 로드무비'의 부활이다.
이 영화에서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연기는 가히 신의 경지다. 그녀는 극도로 미니멀 한 연기를 구사하는데, 그 안에서 온갖 감정의 미묘한 소용돌이를 표출한다.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2017) 때와는 다른 패턴이지만, 풍부한 뉘앙스를 알게 모르게 남기는 특유의 액팅은 여전히 강력하다.
<노매드랜드>를 빛내는 주역은 또 있다. 바로 미국 중서부의 대자연이다. 황량하지만 무한히 아름다운 아메리칸 하트랜드(American Heartland)는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솟는 마력을 발휘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체험할 드문 기회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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