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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인 벨지움]“네 안의 누군가가 널 지켜줄 거야”

이태원프리덤@ 2021. 12. 12. 17:01




팬데믹 사태로 영화 촬영 현장이 중단되고, 벨기에 앤트워프의 한 호텔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게 된 유태오가 셀프 카메라로 자신을 찍은 영화. 영화 소개엔 다큐멘터리라고 적혀 있고, 영화가 프리미어 상영된 영화제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제'이지만, 그저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픽션적인 요소가 많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상, 배우 유태오라는 존재와 그가 처한 상황, 그 상황에 그가 한 행동들이 실제 일어났던 '기록'인 것은 분명하지만, 감독 유태오가 그 재료들을 활용하여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세계엔 검은 비니와 안경을 쓰고 손가락엔 두 개의 반지를 낀 또 다른 유태오(2)가 있다. 유태오2는 영어, 독일어,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유태오에게 말을 건다. 둘의 대화가 나오긴 하지만 1인 2역의 셀프 카메라이므로 둘이 동시에 등장하는 투샷은 없다. (아마) 한 태오의 대사 부분 영상을 쭉 찍고, 다른 태오의 대사를 한 번에 찍었을 것이므로, 이때 벌어지는 둘의 대화는 한 사람의 말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으로써의 '대화'가 아니며, 그래서 그 순간부터 다큐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영화에 깊이가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포인트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서 1인 2역이라기보다는 무인 무역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초반에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더 진짜다?' 라는 뉘앙스의 말이 인용된다. 혼자일 때가 아니라 외로울 때 였는지.. 이게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이었던 건지 가물가물하지만, 그냥 이 글이 완성도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더 본모습을 드러낸다.'로 대충 상정해 보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me와 myself 간의 대화를, 같은 얼굴을 한 태오1과 태오2를 통해 영상으로 구현해낸 것을 보며, 나는 태오1과 태오2 모두 픽션의 의미로써 가짜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는 셀프카메라 치고 은근히 컷이 많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내 머릿속에는 이 짧은 컷컷을 위해 카메라를 다른 곳으로 옮겨 세우고 있는 사람 유태오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진짜 다큐멘터리라면, 그건 이 영화가 픽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오의 픽션 세계에 홀연히 나타난 유태오2는, 외로움에 미친 한 인간의 정신 상태를 비추는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방에서 홀로 카메라를 옮겨가며 영화를 찍는 행위 자체가 미친 짓인 것은 아닐까. 영화에 미친 사람. 유태오가 실제로 이렇게 영화, 시네마에 관한 생각을 하며 사는 인간인지는 모르겠다. 그게 진짜 그의 '본모습'인지, 아니면 픽션인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진짜로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앞으로의 그의 행보이다. 그의 미래 인생이, 그가 영화에서 태오1 태오2로 분하여 뱉은 대사들과 일치하게 될 때, 누군가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세상이 될 것이며, 비로소 이 영화 또한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다.


* 인스타에 올린 영상이라는데, 이게 그대로 영화 중간에 나오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qvEVCAZI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