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폴> 몰아치는 중력의 파도 위에 빛나는 상상력. 보고 싶은 것만 봐도 즐겁다.
오랜만에 기대하던 SF 재난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잠을 설쳤다. 어린 시절 보았던 투모로우와 2012를 보고 또 봤던 나에겐 정말 기대되는 영화였다. 왜 난 이러한 영화 장르를 좋아하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단순하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가면서 과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학교 도서관에서 과학동아와 뉴턴이라는 잡지를 보면 볼수록 SF 재난영화의 필수적인 클리셰로 자리 잡은 많은 이론과 가설들을 접하면서 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또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SF 재난영화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 숨어있는 조그마한 사실에서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지고, 그 점이 정말 재밌는 것이라고. 또 너무 뻔한 이야기 속 숨어있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실이 어긋나면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란!
<문폴>은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덧붙여 시작한다.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의 오프닝 시퀀스가 떠올랐다. 그도 아마겟돈이라는 흥미진진한 재난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기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 미드웨이에서 애머리히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페트릭 윌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공포영화로 유명한 제임스 완 감독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그를 많이 접했던 나로선 정말 반가운 얼굴이었다. 재난영화와 공포영화는 같은 부분을 관통하기에 좀 더 익숙하게 다가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그래비티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떠올랐다. 공허한 우주 속 지구와 달 그리고 태양만이 전부처럼 느껴지는 공간. 노래만이 그 정적을 깨는 것 같다. 우주에선 노래는 필수가 아닐까.
스토리는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플롯을 따른다. 하지만 패트릭 윌슨과 할리 베리 그리고 존 브래들리의 연기가 그 간극을 매워주는 느낌이다. 참고로 나는 많은 기대 속에 여러 예고편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달이 떨어지는 재난영화라는 설정만 알고서 영화를 보았다. 아마 내 마음속에는 이미 익숙해진 재난영화의 플롯에 대한 반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익숙한 플롯에서 나오는 장점이 극의 흐름을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에머리히 감독의 우주를 향한 다양한 오마주는 약방의 감초처럼 이 영화의 포인트다.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중력의 파도가 아닐까 싶다. 지구로 낙하하는 달의 기조력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일명 중력의 파도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달이 지구의 로슈 한계를 넘어서 붕괴되며 발생하는 월석 파편의 낙하는 전작의 폭발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달이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조석 간만의 차로 인해 발생하는 해일이었다. 재난영화에서 자주 등장한 엄청난 높이의 해일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밤에 낮게 깔리는 해일은 흡사 2011년 발생한 일본 대지진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뭔가 현실적인 느낌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져 몰입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해결하는데 발휘된 상상력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느낌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아무런 정보 없이 날 것으로 직면한다면 신선한 느낌마저 든다. 다만 여러 오마주를 넣은 만큼 속도감에 치중한다. 인물 간의 심리묘사는 제한적이며 전 지구적인 공감대를 얻는 것은 최소화한다. 그만큼 호불호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아치는 서스펜스와 스펙터클한 비주얼은 이를 잘 포장한다.
감압 없이 우주선의 문을 여는 장면이나 짧은 시간 안에 얼렁뚱땅 계산되는 데이터와 예측 모델들의 장면, 터무니없는 준비기간으로 우주선을 쏴 올리고 조종하는 장면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 달의 중력을 견디는 장면 등 많은 오류가 눈에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고. 이 영화는 한 번쯤 상상해보았던 장면을 눈앞으로 옮겨서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확한 고증과 새로운 과학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따져볼 때 선택과 집중은 기회비용을 현저하게 낮춰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과학적인 고증에 사용하는 시간과 비용을 거대한 스케일의 그래픽아트에 투자하여 표현하는 것이 이 영화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관객들은 입장은 다양하기 때문에 호불호는 확실할 것이다. 이런 영화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치밀하고 섬세한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영화들을 접하게 된 건 우연한 기회에 TV를 틀었을 때였다. 부모님 몰래 TV를 볼 때 우연히 영화채널을 틀면 나오던 영화 중에 특히 나를 붙잡았던 건 SF 재난영화였다. 그 어떤 매체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SF 재난영화만의 매력이 나를 잡아당겼다. 거대한 파도, 떨어지는 유성, 폭발하는 화산, 역전되는 자기장과 태양풍, 막을 수 없는 토네이도 등은 나를 TV 화면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장하며 다양한 과학적 사실을 배우면서 과학 시간에 선생님께서 틀어주셨던 영화 코어는 아직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문폴>을 보면서 어쩌면 나는 이런 과학적 고증을 지키는 영화도 좋지만 큰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봤다. 언더독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과학적인 것을 따지면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에서 나온 장면들 속에서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원리는 어떻게 되는지를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찾아봤던 것 같다. 선후관계의 역전. 단순한 이 차이는 의외로 크게 작용한다. 어쩌면 우리가 나이를 먹고, 더 많이 경험하면서 계산적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게 나쁘다거나 잘 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때때로 그 천진난만했던 시절이 그립고 동심을 가지고 그때처럼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특정한 자본이 문화콘텐츠 분야에 많이 들어오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 자본이 흘러들어 가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밀접하게 즐기는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어려워진 영화업계와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그로 인한 과도하고 개연성 없는 연출은 눈살을 찌푸리고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시너지를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양한 작품에 자본이 공급되는 것이 <문폴>같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 아쉽다.
달이 떨어진다는 정보만 알고 영화를 본 만큼 SF 재난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애머리히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번 영화도 무리 없이 즐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관도 관객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래도 가슴을 뻥 뚫어줄 시원한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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