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연예/책 리뷰

[인듀어런스]-책 리뷰(새클턴의 위대한 실패)

이태원프리덤@ 2023. 1. 1. 15:02

책을 펼치면 남극의 부빙과 얼음과 눈과 배(인듀어런스 호)가 절묘하게 어울린 이국적 남극사진이 먼저 눈길을 끈다. 어니스트 새클턴을 탐험대장으로 한 28인의 남극탐험대원이었던 사진사 프랭크 헐리가 죽음과의 사투속에서도 사진기를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책은 170여쪽의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그야말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기록이다. 남극의 부빙에 갖혀 배가 침몰한 이후 그들이 문명세계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장장 2년에 가까운 기간이 필요하였다.

 

사실 20세기초 극점탐험 경쟁에 있어서 영국은 패배자였다. 북극은 미국인 피어리가 1909년 최초로 발을 디뎠고 남극에서는 190년 영국의 스콧이 노르웨이의 아문젠과 경합을 벌였지만 아문젠에게 기쁨과 명예가 주어졌을 뿐 스콧에게는 실망과 좌절 그리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스콧의 비극적 죽음이 알려진 지 1년 감에 감행된 새클턴의 탐험계획은 영국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남극점 정복은 물론 남극대륙 횡단까지 포함한 마지막 극점탐험 원정이었다.

   

새클턴의 탐험은 그들이 타고간 배의 이름인 인듀어런스(endurance)처럼 끊없는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계획과는 달리 목적지를 불과 150km 앞두고 이들이 타고 온 인듀어런스호는 얼어붙은 바다에 갖혀버린다. 배는 곧 부서졌고 남극해에 떠다니는 얼음덩어리(유빙)에 몸을 싫은 이들은 이때부터 상사을 초월하는 역경에 처하게 된다. 비상식량과 탈출용 돚단배 3척이 그들이 가라앉는 인듀어런스호에서 챙길 수 있는 전부였다.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어려움을 헤쳐 나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인류가 살아왔던 원시사회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물개와 펭귄을 잡아 식량을 확보하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 돚단배를 집으로 활용하고 모두가 역할을 분담해 계획적 일상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가장 큰 목표는 오늘을 살아남자는 것이었다. 호머의 오딧에이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치 방황과 고난은 새클턴 일행의 환경과 고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새클턴의 탐험은 비록 목적을 이루지 못한 실패였지만, 모든 대원이 일심단결하여 고난을 견뎌 마침내 전원 무사히 구출된 위대한 실패였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28명이 비상식량에 의존해 몇년 동안 생존해 있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 건 틀림없습니다. 탐험대장 새클턴의 정확한 상황인식과 적절한 대안의 선택, 한 치 차질없는 업무분장과 협동심.... 물론 이런 이면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마음과 같은 부분들이 밑바탕에 공유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우리들에게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교훈을 주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게 다가온 부분은 일행이 부빙에 떠밀려 오다가 엘리펀트섬에 상륙하고 나서 6명의 원정대를 꾸려 포경선이 있는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제임스 커드호를 타고 출발하는 장면입니다. 돚단배에 의지해 1,000킬로미터가 넘는 목적지를 향해 과감하게 출발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뒤에 남아 구조를 기다린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인내와 용기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불가능해 보이는 두가지 선택에서 각자의 길을 맡은 사람들의 말하지 못하는 갈등과 불안과 용기를 생각해 봅니다.

 

새클턴의 탐험대는 비록 북극대륙 횡단이란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조난당한 지 634일째 되는 날, 칠레 정부가 급파한 군함으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됩니다. 한 마디로 수많은 교훈을 준 위대한 실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타고난 모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새클턴은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도 다시 남극도전을 하다가 심장병으로 죽게 되고 사우스 조지아섬에 묻히게 됩니다. 아마도 새클턴이 영국의 공동묘지에 묻히기에는 너무나 답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